디에고 시메오네

"엘 촐로(El Cholo)" 는 아르헨티나 국가 대표팀과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그의 업적을 남겼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뛰었던 팀과 코치로 있었던 팀들도 그를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디에고 시메오네

마지막 업데이트: 10 6월, 2020

“엘 촐로(El Cholo)” 라는 별명을 가진 디에고 시메오네는 축구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상징이자 아르헨티나 축구에서 빠질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선수이자 코치로 역사적인 타이틀을 얻었다. 이런 타이틀에는 그의 불같은 성격이 항상 함께 따라다닌다. 오늘 이 글에서는 스페인 축구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이름을 날린 디에고 시메오네라는 사람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축구 선수 디에고 시메오네

아르헨티나에서 시작

디에고 시메오네는 1987년, 아르헨티나  벨레스 사르스필드 라는 축구팀에서 프로 선수로 활약한 게 선수로서의 삶의 시작이다. 비록 1차 팀이었지만, 그는 그때 17살이었다. 아르헨티나 국가 대표 카멜로 시메오네와 닮아서 “코리토” 라는 별명을 얻었다.

시메오네는 에너지가 넘쳤고, 정말 헌신적으로 경기에 임했다. 그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했는데, 그동안 자신의 입지를 다지며 공격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실제로 그는 벨레즈와 함께 82 게임을 했고, 15골을 넣었다. 그는 벨레즈 이후, 다른 팀에서 활약할 때에도 비슷한 평균 득점을 유지했다.

유럽에서의 활동

그 이후, 시메오네가 20살이 되었을 때 에이씨 피사로 이직했고, 이 팀에서 2년간 뛰었다. 그 이후에는 카를로스 빌라도의 FC 감독은 그에게 백만 유로가 조금 넘는 금액을 지불했다. 

시메오네는 디에고 마라도나는 안달루시안 팀에서 2년간 뛰었다. 이 기간에 시메오네는 큰 발전을 이루었다.

축구 선수 디에고 시메오네

그 당시 시메오네는 1994년 후반에 450만 유로(요즘 가치로는 약 250만 유로)를 받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갔다. 이 금액은 축구계에서 기록적인 금액이다.

그는 차트 순위 중 중간 정도에 있는 팀으로 합류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가 합류하고 세 계절만 지나면 그는 축구계 아이돌이 되었다. 그는 1995/96년 시즌에 스페인 주요 축구 토너먼트라 코파 델 레디와 라 리가 토너먼트 게임에서 팀장으로 팀을 이끌었다. 

그 이후에는 인터 밀란으로 옮겼다. 그가 그 팀에서 뛰는 동안 그 팀은 UEFA 유로파 리그 컵에서 우승했다. 그 이후 그는 SS Lazio 로 옮겼고, 스쿠데토, 이탈리안 컵, 이탈리안 슈퍼 컵, 유로피언 슈퍼 컵에서 우승했다. 

2003년에서 2005년 사이 시메오네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옮겼지만, 이때에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축구 선수로서의 삶 마지막, 은퇴하기 직전에 그가 사랑했던 레이싱 클럽팀 유니폼을 기부했다. 

아르헨티나 축구 대표팀과 디에고 시메오네

그는 주니어 리그 시절부터 수년을 아르헨티나 축구 대표팀에 바쳤다. 14년 동안 106경기를 뛰었고, 언제부턴가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11 골을 넣었고, 4개의 타이틀을 얻었다. 

  • 두 개의 코파 아메리카(Copa America) : 1991과 1991
  • 아르테 미오 프랜치 트로(Artemio Franchi Trophy)
  • FIFA 컨페더레이션스(Confederations) 컵 1992
아르헨티나 축구 대표팀과 디에고 시메오네

무엇보다 시메오네는 3개의 월드컵(1994년 미국, 1998년 프랑스, 2002년 한일)을 뛰었으며,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땄다.

남들과 다른 코치, 디에고 시메오네

선수였을 때의 시메오네는 보수적이고 방어적인 게임을 떠올리게 할지도 모르지만, 아르헨티나 코치로서의 삶은 선수로 뛰던 때와 다르다. 은퇴한 후 그가 사랑하던 레이싱 클럽의 코치로 코치의 삶을 시작했다. 

그가 팀의 규칙을 지키기 위해 클럽 에스투디안테스 데 라 플라타로 옮겼다. 세바스티안 베론 팀장과 함께 23년 동안 그 팀에서 그 팀이 잃어버렸던 명예를 다시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의 팀은 라이벌 팀인 짐나시아와의 경기에서 7-0으로 이겼다. 

시메오네는 리버 코치를 역임했고, 이 팀에서 코치를 맡는 동안은 기복이 있었다. 첫 경기는 엄청 치열했는데, 상대 팀이었던 산로렌조 보다 2골을 더 확보하고 2명의 선수를 확보했지만, 토너먼트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시메오네의 팀 리버가 클라수라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후에 판이 바뀌었다. 시메오네는 코파 수아메리카나 준준결증에서 탈락한 후, 그 해가 지나기 전에 그 팀을 떠날 예정이었다.

시메오네는 2009/2010에 산 로렌조에서 잠깐 코칭을 한 후 레이싱(Racing)에서 두 번째 시작을 했다. 하지만 이 팀에서는 긍정적인 결과를 내지 못했다. 그가 두 팀에서 일하는 동안 2010/2011 시즌 카타니아 이탈리아노 에서도 잠깐 일했는데 분열을 유지하는 것을 도왔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황금시대의 시작

2011년 다시 마드리드의 비센테 칼데론 경기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곳에서 기술 감독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황금시대의 시작

그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돌아간 후 그 팀은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시기를 보냈다. 바르셀로나-레알 마드리드와의 경쟁에서 우승했을 뿐만 아니라 스페인 2013-14라 리가에서도 우승했다. 

같은 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영원한 라이벌과 경쟁했다. 아틀레티코는 거의 모든 경기에서 주도권을 쥐었지만, 세르지오 라모스 와의 경기에서는 4대 1로 졌다.

그래도 그들은 기죽지 않았다. 2015/2016 밀라노에서 열리는 주세페 미자 스타디움에서 다시 만나는 날을 고대하고 있다.

시메오네는 그의 업적, 챔피언으로서의 마음가짐, 최고가 되는 것을 갈망했던 것의 결과로 축구 역사에 남게 되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뿐만 아니라 스페인 축구, 아르헨티나 축구에서 그는 역사적인 인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우리는 앞으로 몇 년 간 더 그를 볼 수 있다.


인용된 모든 출처는 우리 팀에 의해 집요하게 검토되어 질의의 질, 신뢰성, 시대에 맞음 및 타당성을 보장하기 위해 처리되었습니다. 이 문서의 참고 문헌은 신뢰성이 있으며 학문적 또는 과학적으로 정확합니다.



이 텍스트는 정보 제공 목적으로만 제공되며 전문가와의 상담을 대체하지 않습니다. 의심이 들면 전문가와 상의하십시오.